제목[야고보의 복음 단상] 2023년 3월 19일2023-03-19 09:55
작성자 Level 10

[야고보의 복음 단상]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 복음은 여러 “완고함” 곧, 돌처럼 굳어버린 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라고 항변했던 그들은 정작 주님 안에서 배우지 못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는 자리가 아니라 가르치려 드는 자리에만 서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주님 안에서 배우지 않는 자리, 듣지 않는 자리에 자주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위로받아야 한다.”라고 신자들에게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주님 안에서 위로를 청하기보다 세상의 위로를 더 찾고 있기 때문이고 저의 즐거움, 욕심, 감정을 더 따르는 저를 늘 바라보게 됩니다.


복음의 종교지도자들이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며, 자신의 전통성을 자랑하며, 주님 안에서 눈먼 이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저도 사람들이 이미 주님 안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교회의 권위를 빌려 끊임없이 가르치려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되묻게 됩니다.


또 복음의 제자들처럼 "저이가 눈먼 이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라는 물음에 “그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고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어쩌면 우리는 자주 이웃의 불행에, 이웃의 아픈 일에 쉬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마음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요한 9,2)


그는 게을러서, 어리석어서, 욕심 많기 때문이라 쉬 이웃을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의 받아들이지 못하던 그들의 완고함이 자주 우리의 완고함입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거의 눈멀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우리가 실은 제대로 보지 못함을 알 때 십자가에 멀리 있으면서, 가까이 있는 척,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희생하고 있는 척, 주님 앞에 서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도 우리는 자주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나는 선하고 너는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루카 18,19)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우리의 선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업적으로 희생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이고 선물임을 우리는 자주 잊고 “완고함”으로 이웃을 그리고 주님을 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을 선두로 해서 조금 앞에 그리고 조금 뒤에서 서로 어깨 기대어 걸어갈 따름입니다.


주님 제가 눈 감는 것에서, 눈뜰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서 바라보셨던 그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마음을 청하는 아침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