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의 복음 단상]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살아가면서 그분의 제자임이 고마운 스승을 만나는 일은 행복한 일입니다.
제가 좋은 스승들을 만나면서 배운 것들은 이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옮기는 것이 번역은 아니다.
읽을 줄 안다고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글들을 옮기면 그 일은 번역이 아니라 반역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신학대전을 너무나도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시던 교수 신부님의 강의 안에서,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이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고 번역을 했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와 결을 같이하던 교부학을 가르치셨던 교수님은 저에게 정말 좋은 글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 누가 읽더라도 이해될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 하셨습니다.
마치 어미 새가 음식을 꼭꼭 씹어 먹기 좋게 만든 뒤 새끼 새에게 먹이는 것처럼, 그렇게 충분히 이해한 뒤에 이야기를 건네는 스승들의 노력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말씀은 전혀 현학적이지도, 미사여구가 덕지덕지 붙지도, 화려한 수사가 가득하지도 않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하고 명확합니다.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러합니다.
"너는 네가 하는 일들로 네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는가?"
유다인들이 자신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다 말하면서도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들의 무지가 곧 우리의 알지 못함과 닮았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다른 이름 "사람의 아들"
유다인들은 사람 안에 온전히 살아계신 하느님을 상상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붙여진 죄명 "신성모독"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람이 하느님을 섬긴다고, 웃기지도 않을 이야기입니다.
입만 열면 이웃을 씹어대는 사람이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사람에 대한 경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가슴에 새기는 아침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사람으로 살고 계시나요?
주님, 저희가 말보다는 진실한 생활과 행동으로 주님을 찬미하며,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