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의 복음 단상]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주님의 죽음이 유다 이스카리옷 때문이라고 말하면 조금 위안이 되는 걸까? 나라면 주님을 안 팔았을 거라 말하며 주님의 죽음에 가책을 조금 덜 수 있을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말은 그가 특별히 더 나빴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바로 우리 가운데, 더 구체적으로는 다른 무리가 아닌, 주님의 제자들, 곧 우리의 다른 이름이라는 의미인지 모릅니다.
제자들도 그와 함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유다 또한 주님의 사형 선고 앞에 깊이 뉘우쳤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그도 주님의 제자였고, 주님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마태 27,3)
마치 베드로가 닭이 울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슬피 울었던 것처럼 그도 주님의 죽음을 슬퍼한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듣고 함께 묵고했던 그 어느 제자 하나도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자리였고, 우리의 자리임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유다는 혼자 슬퍼하는 자리에 남았고,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지 못했던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
주님께 충실하지 못했던 이들이 서로를 위해 빌어주는 자리, 서로 용서를 구하는 자리가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미사 경문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베드로가 스스로를 용서했을까? 바오로가 스스로를 용서했을까?
어쩌면 저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랬기에 그는 주님을 죽기까지 증언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고, 바오로는 주님을 전하기 위한 여정에 자신을 바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아픔이 혼자 아파하는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하길 기도합니다.
나의 후회가 그저 후회로 남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다시 서는 시간이길 희망합니다.
주님께 고백합니다.
저의 욕심만을 채우는 자리, 저의 욕정만을 채우는 자리에 주님 저는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주었고, 죽음을 가져다주었음을 알고있습니다.
하오나 주님, 저의 모든 시간이 당신을 향하고, 당신의 사랑 안에서 숨쉬기를 기도합니다.
서로를 위해 빌어주는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아침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