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의 복음 단상]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니코데모는 밤에 주님을 찾아왔을까? 유다가 주님을 팔아넘긴 시간도 밤이었습니다. (요한 13,30)
그에게는 최고 의회 의원으로서 자신의 위신과 자리가 더 중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승리한 백성". "백성의 정복자"란 뜻의 그의 이름, 그에게는 안정된 수입, 사회적 지위도, 어쩌면 편안한 노후도 보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였기에 자신의 안위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주님을 낮에 찾아오기에는 너무 위험이 컸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여기기는 했지만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는 못했고 결국 요한의 죽음을 가져다 온 것처럼...
니코데모도 헤로데도 잃을게 너무 많은 사람의 자리였습니다.
확실한 신분이 확실한 노후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성령에 따른 삶을 가로막는 아이러니를 오늘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그는 전승에 따르면 후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순교했다고 전해지지만 복음의 당시에는 주님을 스승님으로 고백하지만, 주님의 제자로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의원들 앞에서 주님을 변론하려다 이내 조용해진 것과, 사람들의 눈앞에도 아랑곳 않고 주님의 발을 씻어 드리고 입을 맞춘 죄 많은 여인이라 불리던 여인의 믿음이 대조적으로 다가옵니다. (요한 7,51)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8)
믿음이 그저 몸을 치장하는 장식에 그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을 따르기에는 잃을게 너무 많은 자리에 나 또한 서 있지 않기를 바라는 아침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