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야고보의 복음 단상] 2023년 3월 29일2023-03-29 10:05
작성자 Level 10

[야고보의 복음 단상]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의 차이를 우리는 아는 사람일까?


그 차이를 여러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만 꼽으라면 "목숨을 걸 수 있는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쉬 말하는 믿음은 아직 주님을 사랑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걸지 않기에 주님을 너무 쉬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걸지 않기에 이웃을 쉬 이야기합니다.


문득 복음 안에서 자신에게 "나는 주님을 좋아하는가?, 사랑하는가?" 묻고 싶어집니다.


마치 자신의 취미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저 취사선택 가능한 그 무엇으로 믿음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복음은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을 위해서 무엇을 걸 수 있습니까?"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고 사람들의 믿음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다니엘 예언서 3장은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손에서 천사를 통해 극적으로 구해내신 이야기를 서술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구약의 마카베오기 하권 7장에서는 율법을 준수하느라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도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어머니도 아들들의 뒤를 이어 죽었다. 이교 제사를 거부한 이야기와 극심한 고문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기로 하자."(2마카 7,41)


어려움에서 극적으로 구해낸 이야기는 듣기 좋은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 때문에 하루아침에 일곱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죽음은 어떠합니까?


동시에 무고한 아들의 죽음을 안아야 했던, 첫 신앙인 성모님의 자리는 어떠합니까?


하늘을 원망하고, 하늘 저주하지 않는 것이 되레 이상한 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자리이고,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선택이고 오직 은총 안에서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될 은총을 청하는 아침입니다.


아무것도 걸지 않기에 주님을 너무 쉬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걸지 않기에 이웃을 쉬 이야기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