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야고보의 복음 단상] 2023년 3월 26일2023-03-27 13:30
작성자 Level 10

[야고보의 복음 단상]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그리고 복음에 표현되는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복음의 주님은 어쩌면 우리의 눈에는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생각되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주님, 그리고 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울지 않는 사실은 울지 못하는 우리의 자리, 실은 누가 더 병든 세상을 살고 있는가? 복음 안에서 묻게 됩니다.


어쩌면 복음이 말하는 주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선 가르침으로 생각되는지도 모릅니다.


속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고, 사람을 경계하는데 익숙한 우리의 자리입니다.


속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우리 앞에 매번 속아주시는 주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의 본기도도 낯선 선포입니다.

성자께서는 죽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으니 주님의 도우심으로 저희도 그 사랑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게 하소서.


내 감정이 먼저인 우리에게, 당장의 내 사정이 먼저인 우리에게, 그리고 다른 이를 경계하고 자신을 의지하는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말도, 그분의 도움도 낯선 이야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은 우리의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한 길인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셨던 “북받치다.”는 말이 어떤 의미로 여러분에게는 다가오나요?


재작년 7월 9일 우리는 김정동 스테파노 형제님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들이 장례미사에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소회를 밝혔습니다.


소아마비를 알았던 아들이 돈이 없어서 치료 못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다짐, 그리고 내 아들은 꼭 걷게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미국이라는 땅에 정착해서 열심히 땀 흘리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주님 품 안에 든 아버지의 안식을 기원했습니다.


지팡이를 짚기는 했지만, 그 아들은 아버지의 소망대로 걷게 되었고, 장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담은 아들의 글을 들었을 때, 그리고 남편의 장례미사 중에 영성체 후에 형제님의 부인께서 나즈막히 부르던 주님의 기도도(Our Father...) 참으로 마음을 북받치게 했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는 주님 안에서, 우리는 위로를 청합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모든 죽음 앞에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저는 너무나도 이성적이기만 한 사제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밭이라면, 보기에는 좋지만, 잡초도 벌레도 없는 그런 정리된 정형화된 밭이 아니라, 힘들더라도 벌레도 살고 잡초도 있는 그런 밭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어쩌면 어려운 길이지만 동시에 어려운 길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아파하는 이들을 보고 함께 아파하는 일,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는 일 

죽어버린 돌처럼 굳어버린 마음이 아니라 살처럼 여린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복음 안에서 차이를 둬서 말하는 지상의 목숨과 생명이라는 말의 간극처럼,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너무 먼 곳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서로를 탓하며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세상에 생명을 주신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도 배워가야 합니다.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는 주님 안에서, 우리는 위로를 청합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모든 죽음 앞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오늘 미사의 본기도로 단상을 마무리합니다.


성자께서는 죽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으니 주님의 도우심으로 저희도 그 사랑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