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의 복음 단상]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악마의 유혹의 명분과 주님의 육화 목적은 같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이렇게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신 이유도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기 위함입니다.
이걸 조금 어려운 신학 용어로는 "주님의 육화는 인간의 신화를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다릅니다.
하느님처럼, 주님처럼 되고 싶은가요? "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다르게 묻습니다.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고한 죽음의 자리를 원합니까?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은 모두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은 시점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성령께서 임하시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신임까지 받은 직후라고 서술합니다.
이 시점 안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복음은 유혹의 계기를 약할 때가 아니라, 도리어 강할 때, 거룩한 소명감으로 넘쳐날 때, 대의를 품을 때로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려고 할 때, 자신을 희생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다짐할 때, 바로 그때 유혹은 우리 가까이 있고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복음 안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이 약하기만 한 일상의 보통사람들인 경우보다는 되려 그들은 세상을 위한다는 사람,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사람인 경우가 더 많고,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사람도, 성경을 잘 안다는 사람, 열심히 기도한다는 그리고 주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악마도 성경을 알고 성경 구절로 주님을 유혹하지만 주님은 성경의 다른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냅니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빵으로 유혹할 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빵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주님은 배고픈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여러번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도 빵과 포도주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대답하십니다.
다른 유혹들에도 주님은 한 쪽에 치우친 성경 말씀이 아니라, 성경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래서 어느 성서학자는 "성경의 거의 모든 문장은 그것과 정반대로 말하는 문장, 또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으로 반박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
사순은 본질로 돌아가는 시기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은 주님의 십자가 입니다.
어쩌면 십자가의 길은 가고 싶지 않은 곳이고, 복음은 자주 듣고 싶지 않은 가르침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있게 하는 무엇에 익숙한지 살피고 그것을 피할 은총을 구하는 아침입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