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의 복음 단상]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누군가를 죽이자고 데려온 그 자리, 그들은 복음의 그 여인도 예수님도 죽이자고 작정한 그들입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허울만 좋은 스승님이라는 말, 그들의 스승님이라는 말의 이면에는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걸려들 거다, 한 마디만 해봐라 골로 보내줄께라는 악의가 느껴지기에 더욱 의미 없게 들리는 말입니다.
제가 주님이라면 긴장했을 법도 한데, 겁나게 빠른 계산으로, 어떻게 하면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그들을 입다물게 할까? 고민했을 법한 그 순간에, 주님의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합니다.
성격 급한 제 입장에서는 속 터질 노릇입니다. "뭐 하는겨?"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을 빌리면 "황당 시츄에이션"입니다.
마치 그분의 사형선고 앞에선 침묵과도 같고, 오늘 제1독서의 수산나의 탄식과도 같습니다.
아름답기만 하고 주님을 경외했던 수산나의 억울한 죽음 앞에선 절규...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다니엘 13,43)
오늘 복음의 대응은 다니엘처럼 지혜롭지도, 또 통쾌하지도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저 침묵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지혜도 따라갈 수 없는 침묵입니다.
모래에 씌여진 이름은 언젠가 지워집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나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쌓아 올린 그 무엇도, 위대한 업적도, 그분의 삶이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보다 항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생명의 영"이라 불리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우리가 찾을 수 없는 길입니다.
그들의 고발을 평화로, 그들의 비난을 연민으로, 그들의 미움을 자비로 바꾸는 주님의 성령 안에 가득 찬 대응을 복음은 선포합니다.
우리도 감정에 휘둘릴 때마다, 감정적인 대응의 지배를 받을 때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쉼을 청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너희는 끌려갈 때(감정이든 무엇이든)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2)
주님의 묵직했던 한 말씀으로 고발이 평화로 비난이 연민으로 그리고 미움이 자비로 바뀌기를 고대하고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주님 홀로 거룩하시고, 주님 홀로 찬미 받으소서. "성령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만들어 주십시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