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야고보의 복음 단상] 2023년 4월 7일2023-04-07 12:25
작성자 Level 10

[야고보의 복음 단상]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요한 19,14)


보라, 십자 나무, 보라, 너의 왕을

금관이 아니라 가시관의 예수님을...


주님의 죽음을 보고, 무엇을 너는 배우는가?

분노를 분노로 대갚음하지 않았던 주님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묻습니다.


이사야서는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이사야 53,2)


미움이 폭력이 되고 폭력이 전쟁이 되고 그 전쟁이 죽음이 되는 그 자리에 우리는 자주 서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정의를 외쳤던 많은 이들이 되려 정의롭지 못한 자리에 있었음을, 주님을 경배하던 이들이 주님을 적대시하는 자리에 서 있었음을 복음은 전합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누군가를 철저히 죽일만한 힘과 권력을 가진 자가 그 힘과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그 길은 없습니다.


내 원수를 죽일만한 무기가 내 손에 주어져 있다고 믿는 사람이 그 칼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아니 "복수는 나의 것."이라 말하게 됩니다.


역사 안에서 많은 권력자들이 자신의 치적을 위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서는 했던 말 "유감입니다.", "불가피한 희생이었습니다." 했던 것과도 같고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그이의 죽음에 나는 책임이 없다. "유감이다." 말했던 것과도 닮았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라면, 자기 자식의 죽음이라면, 유감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주님 길은 내리누르는 우리의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였고, 그 길의 완성이 십자가였습니다.


"임금은 백성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이것은 도덕적 명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쌍한 자리, 비참한 자리에 서 있는 자만이 찾을 수 있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이웃의 죽음을 슬퍼하셨던 주님이기에 죽음의 자리를 향하셨습니다. 이웃의 죽음을 슬퍼하지 못하는 아니, 슬퍼하지 않는 우리를 위해서...


신앙은 그저 도덕적 명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삶이고 또 배움입니다.


우리의 무딘 마음이 주님 안에서 살처럼 여린 마음으로 살아있기 위한 길입니다.


주님을 임금으로 고백하는 자리

그분의 십자가를 경배하는 자리

그 사랑을 잊지 않기를 기도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Luke 23,42)


아멘